부처님오신날과 어떤 존엄한 퇴장

95세로 세상 떠난 윤치호의 딸… 집착 버리고 스스로 곡기 끊어
존엄사법 100일… 연명의료 'NO''…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묻는 시대로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아침 신문의 금기(禁忌) 중 하나가 있다. 죽음이다. 신문사에서 책 담당을 오래 했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신간 소개는 늘 머뭇거렸다. 임종이 임박한 노인이라도, 이 화제는 유쾌하지 않은 법. 그런 제약을 깨고 Books 커버스토리로 다뤘던 적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글 쓰는 의사 아툴 가완디의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 또 하나는 희귀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존엄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화제를 모은 영국 출신 의사·작가 올리버 색스(1933~2015)의 스토리였다. 그는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은 과정을 뉴욕타임스에 고백하고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최근에는 국내 신문에 소개되지 않은 부음(訃音) 한 토막을 문상(問喪) 다녀온 선배로부터 들었다. 고인은 95세로 타계한 윤보희 전(前) 이화여대 음악과 교수. 독립협회 창립 주역인 윤치호의 딸이자, 한국 민중신학을 개척하고 이화여대 인문대 학장을 지낸 현영학(1921~2004) 목사의 아내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미군(美軍)을 설득해 수만 명의 피란민을 구한 현봉학과 멕시코 대사를 지낸 현시학, 저널리스트 피터 현 등이 현영학 목사의 동생들이다.

15년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노(老)피아니스트인 윤 전 교수는 자식이 없었다. 연명 치료를 사양하고 병원 문을 스스로 나온 그녀는 퇴원 당일 미용실에 들렀다고 했다. 주변을 정리하기 전, 자신을 먼저 가지런히 한다는 의지였을까. 보물 1호였던 피아노는 조카에게 줬다. 낡고 오래됐지만, 친오빠이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던 윤기선과 함께 쳤던 피아노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한 성격 아니랄까봐, 피아노 옮길 차량 운송비와 기사 품삯은 봉투에 따로 넣었다.

말년까지 자신을 돌봤던 손아래 동서의 자식에게 집을 물려주기로 결정하고는 집 안을 깨끗이 비웠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 식사량을 줄였고 오래지 않아 삶과 이별했다. 고인이 남긴 유언은 세 가지. 부의금 받지 마라, 염(殮)할 때 신체를 끈으로 묶지 마라, 얼굴에는 보자기 덮지 마라. 스스로 선택한 존엄한 퇴장이었다.

생명공학 덕분에 신체는 강화되고 수명은 연장됐지만, 우리는 모두 늙고 죽는다. 이 과정은 점진적이지만 가차없다. 열흘 전에는 호주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104세의 삶을 스스로 마감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00세 넘는 장수만세(長壽萬歲)가 뉴스가 아니라, 그 연장된 삶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가 화두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존엄사법' 시행 100일 만에, 우리나라에서도 7000명 가까운 노인이 연명(延命) 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서두에 인용한 의사 아툴 가완디는 "아름다운 죽음은 없지만,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고 썼다. 그 각론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의 존경을 받는 선현(先賢)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집착에 대한 포기다.

다음 달이면 나는 일찍 돌아가신 선친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이를 살게 된다. 요즘 세상에는 장년에도 한참 미달하는 나이지만, 이제부터의 삶은 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부친을 일찍 떠나보낸 세상의 아들들이라면, 이 무례를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마침 내일은 부처님오신날이다. 다들 뭘 가져보겠다고 싸우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했을 때, 싯다르타는 부처가 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못지않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되물어야 할 시대다.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2018.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