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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사찰들을 가본데는 많지만 보여 줄 사진은 별로 없는것이 후회스럽다.
왜냐하면 80년대와 90년대도 지나간, 2000년대는 관광시대 전성기가 되어서인지, 옛 사찰의 그윽한 맛을 느낄만한곳이 많지 않은것 같다.

 Palace & Historic Site
古 宮,  遺 跡 地
작성일 2009-10-27
ㆍ조회: 487  
서운산 청룡사 (瑞雲山 靑龍寺)

서운산 청룡사 (瑞雲山 靑龍寺) 청룡사(靑龍寺)는 1265년(고려 원종), 경기도 안성의 서운산(瑞雲山)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고 불렀다.
그 후 1364년 (고려 공민왕시절)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크게 중건하여, 절의 이름을 청룡사(靑龍寺)라고 고쳐 불렀고,
산의 이름도 서운산(瑞雲山)이라 하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懶翁)이 이 근처에서 佛道를 크게 일으킬 절터를 찾다가 
이 곳 서운산 기슭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 오는 청룡(靑龍)을 보았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조선 말기에는 교통의 요지이었던 안성장터를 중심으로 전국을 떠돌면서 공연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남사당패(男寺黨)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청룡사 곁의 계곡.. 불당골이 이들의 생활 터전이었으며,
청룡사의 건너편에는 남사당마을이 지금도 존재한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장길산(張吉山)"에도 이 곳 청룡사가 등장한다.
장길산의 스승인 운부대사(雲浮大師)가 세상은 민중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혁명사상을 설파하던 장소로 청룡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미륵(彌勒)의 세상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사적비    事跡碑

 
청룡사에는 一柱門이 없고. 이 사적비(事跡碑)가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사적비(事跡碑)란 어떠한 사건이나 자취를 기록한것이다.
이 비(碑)는 청룡사의 중수(重修)를 가념하기 위하여 1721년 (조선 경종)에 세운 것이다.
비문(碑文)에 청룡사의 창건 연혁과 나옹(懶翁)이 절을 중창할 때의 일과 그 후 조선 숙종 때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을 중건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碑)는 받침돌 위에 비몸(碑身)을 세우고, 지붕돌(屋蓋石)을 얹은 형태인데,
특이하게도 지붕돌 귀퉁이마다 네 마리의 龍이 머리를 들고 서려 있는 모습이다.


청룡사의 문화재들
대웅전 보물, 제824호 ...  영산회괘불탱,  보물 제1257호 ... 동종, 보물 제11-4호... 감로탱(甘露撑), 보물 제1302호...
기타 3층석탑이 문화재자료 59호이며, 사적비(事跡碑)와 금동관세음보살좌상(金銅觀世音菩薩坐像)이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대웅전  大雄殿 ... 보물 제824호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경기유형문화재 제170호
 
청동으로 만든 점, 얼굴과 신체의 단아하고 사실적인 표현 등에서 고려 후기의 보살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 단순화된 구슬 장식 등에서 조선 초기인 1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머리는 상투모양으로 높게 묶은 후 양쪽 어깨로 몇가닥씩 흘려내리게 하였다.
적당히 살이 올라있는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고개를 액간 앞으로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서 마치 깃처럼 한번씩 접혀진 상태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배 부분에서 큰 W자 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하체로 내려온 옷은 양 무릎을 감싸고 무릎 아래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부분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다.


대웅전의 어느 기둥 하나만 집중해서 바라보면, 청룔사의 대웅전 건물이 곧 쓰러 질 것 같다.


영산회괘불상  靈山會掛佛像  .. 보물 제1257호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괘불(靈山會掛佛)로, 괘불(掛佛)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법당 앞 뜰에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들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인데, 가운데의 석가모니는 머리에서 빛이 나고, 특이하게도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올린 시무외인(施無畏人)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모습이다.
이 그림은 1658년 (조선 효종)에 승려 화가 명옥(明鈺)이 그린 것으로, 본존(本尊)의 크기가 매우 컸던 고려말, 조선초의 그림과는 달리 본존인 석가모니가 작아져 상대적으로 주변 인물의 크기외 비슷해진 그림으로
17세기 영산회상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감로탱  甘露撑 ... 보물 제1302호 감로탱이란 ?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하여 그린 불교그림이다. 
이 그림은 가로 200cm, 세로 238cm의 크기이며, 3단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 등을그려 理想世界를 표현하였는데, 특히 보살의 몸 부분을 金가루로 칠하였는데, 이는 다른 불화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한 그림이다.
그림의 가운데 부분은 山水를 배경으로 영혼이 極樂으로 引導되기를 기원하는 제사상을 차려 공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아래 부분에는 俗世의 여러 장면 등이 생동감있게 묘사되어 당시의 퐁속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692년 (조선 숙종)에 제작된 이 불화는 명료한 주제와 안정된 구도, 선명한 색채로 조선 후기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중생의 제도(濟道)와 유교의 효(孝)사상을 강조하는 종교적 의의 또한 매우 크다고 한다.
 

대웅전 내에 보존











있는 그대로의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겨내고 그냥 사용하였다.
울툴불퉁... 부자연(不自然)의 묘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이 것을 보기 위해서라도 청룡사는 와 볼만한 곳이다.
사방의 기둥을 구불구불 휘어진 자연목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균형미와 굴곡의 아름다움이 눈을 사로 잡는...
그리고 대웅전 기둥의 받침돌이나 축대 등이 모두 자연석
그대로 사용하여 서로 잘 어울린다.
기둥의 아랫부분은 굵고, 뚱뚱한데 위로 올라 갈수록 심하게
휘어지고 급격하게 가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저 엄청난
대웅전의 무게를 500년 넘게 떠 받치고 있다.
존경스러움을 넘어 차라리 경외의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일 것이다.
이렇게 구불구불한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한 이유에는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훌륭한 목재를 구하여 반듯하게 지을 욕심은 있었으나,
경제적인 또는 어떤 현실적인 이유로 주위에서 자라는 아무
나무나 베어서 그대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 것이고,
두번째 이유로는 목수(木手)의 기술 수준이 낮다거나,
성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듯한 재목으로 건축하였다면
더욱 쉬었을 것은 너무나 自明한 사실일 것이다.
선천적으로 한국인은 인위적으로 조작과 기교를 부리면
부릴수록 그 대상의 본질이 훼손된다고 믿어 왔다.
그리하여 나무를 가공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도,
인공(人工)의 흔적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노력하였다기 보다는 내면(內面)에 잠재하여 있던
한국적 심성(心性)과 미의식(美意識)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이다.
굵기와 곧기가 각양각색인 목재들... 무게의 중심이 제각각인 기둥으로 지붕의 무게를 고르게 분산시키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몇백년의 풍상(風霜)을 거뜬히 버티고 있는 대웅전.. 이 것은 수학적 계산이나 정밀한 목공의 연장, 도구가 이루어 낸 것이라기 보다는
목수들이 오랜 시간과 경험을 통하여 터득한 " 마음의 저울 "과 " 마음의 자(尺) "가 이루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대웅전의 앞 기둥은 그래도 반듯하게 다듬은 기둥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인의 성정(性情)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미의식(美意識) 또한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주풀이

조선시대의 무가(巫歌) 중에 "성주풀이"라는 노래가 있다.
성주는 한자로 城主, 星主, 城造로 표기가 되는데 집과 집터를 수호하는 신(神)을 말한다.
그 노랫말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높은 산에 남글 찍고, 낮은 산에 터를 닦아, 휘여진 남근 굽다듬고, 굽은 남근이 휘이게 만들어,
횡포 대포를 먹여내어, 아흔아홉 궁(宮) 지을 적에...이 짧은 노랫말 한 대목에 한국인이 지닌
선천적인 심성(心性)이 드러나고 있다.
소나무는 자라면서 휘거나 굽기도 한다. 그러나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기에 별로 아쉬움이 없다.
휜 나무는 굽다듬고, 굽은 나무는 휘이게 다듬어 쓰면 되기 때문이다. 
청룡사 대웅전의 기둥이나 대들보가 비정형(非定形)인 것은 목수가 올곧게 다듬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결과이다.
하고자 했으나 미완(未完)으로 남기는 것과 당초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 없어 하지 않은 것은
의미상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전자(前者)가 인간의 능력과 성실성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後者)는 성정(性情)과 미의식(美意識)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이 대웅전 건물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능력이나 성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심성이나 미의식의 문제임을 웅변해 주고 있다.

  
  


이 곳 청룡사에는 一柱門도 사천왕문(四天王門)도 따로 없다. 그래서 대웅전 처마에 사천왕(四天王)을 그려 놓았다.
어디에 있거나 이 절을 수호하면 되는 것....


3층 석탑   3層石塔
이 곳 청룡사 앞뜰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놓은 모습이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은 4장의 판돌을 세워 4면을 이루게 한 뒤,
판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이 교대로 올려진 탑신부(塔身部)는 몸돌의 모서리에 기단에서와 같은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몸돌의 크기는 2층에서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이로 인하여 전체에 흐르던 비례감이 흐트러지게 되었다.


급격한 한 경사를 이루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돌려 가벼움을 실었으며,
윗면의 네 모서리 線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기단과 지붕돌 모서리의 일부가 깨져 나가고, 꼭대기의 머리 장식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보존이 잘 되었있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있다.
     
 
괘불석주  掛佛石柱
 
 

나옹선사  懶翁禪師


나옹선사는 우리나라 3대 화상의 한 분으로 조선 개국에 도움을 준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다.
그는 여주의 신륵사에서 입적하면서 여러 신화를 남기었지만 풍류시인(風流詩人)이기도 하였다.

  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창공(蒼空)을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말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때로는 한 없는 양보와 배려의 미덕을... 때로는 모든 것을 잊고자 하는 해탈(解탈)의 이념을 ..
때로는 자연을 벗 삼고자 하는 많은 유랑인(流浪人)들과 천민(賤民)들 .. 그리고 한(恨)을 품고 떠도는 이들의 마음을 표현해 주고 있는 詩이다.
이로한 마음이 작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대웅전을 가꿀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또한 나옹선사의 선(禪)과 풍류, 청룡사의 자연스러움과 민중성은 사찰의 전통으로 자리 잡아서, 이러한 전통들이 내려 오면서 자연스럽게 바우덕이(金巖德) 등 남사당패들을 불러들여, 본거지로 삼아 활동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최고의 예술혼을 꽃 피울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종  銅鐘  ... 보물 제11-4호  이 鐘은 검은 빛이 감도는 큰 종으로 1674년에 종루(鐘樓)의 종으로 조성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조선후기의 鐘들 가운데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의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종의 모양을 보면 소리를 좌우하는 음통(音筒)이 맨 위에 있고,
그 옆에는 龍모양의 종을 거는고리(용뉴)가 있다.
그리고 종신(鐘身)의 표면을 보면 위에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을 1줄씩 새기고 , 그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과 9개의 유듀(乳두)가 있다.
이 종은 숙종대에 활동하였던 승장 사인(思印)이 30대 중반에 지준(智俊), 태행(太行), 도겸(道兼),
담연(啖衍), 청윤(淸允)과 함께 만든 통일신라 계열의 동종이다.

 
사인(思印) 등 이 종을 만든 이들의 이름이 양각되어있다.
사인(思印)은 조선 숙종대에 활약하던 사람으로 주로 경기도와 경상도에서 활동하였으며, 그가 만들어 현재 남아있는 8개의 종은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룡사                                                      
 


  
                         남사당패                                                                                                                  동자상(童子像) ? ? ?


산사 주변 풍경

자료발췌 http://blog.daum.net/0118983530/8438708(텍스트 전부와 사진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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